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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원효대사와 해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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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원효대사 스님이 되다

원효대사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입니다. 신당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 꿈에 하늘의 별똥별 하나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얼마 후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는데, 이 때 오색 구름이 온 마을을 뒤덮었습니다. 장차 큰 아이가 될 징조라 기뻐했지만 어머니는 원효대사를 낳은 지 며칠 만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원효는 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원효대사는 다섯 살이 되자 할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에는 화랑(신라 시대 청소년의 민간 수양단체)이 되었습니다. 원효대사는 머릿속에는 항상 죽음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랑으로서 나라일에 대한 걱정도 컸습니다.

 

당시 신라는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원효대사는 귀한 생명의 죽음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결국 원효대사는 서른한 살 때 황룡사에 가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법명을 '원효'(새벽이라는 뜻)라고 지었습니다. 원효는 타고난 총명함과 뛰어난 재주로 무엇이든 한두 번 읽는 동안에 그 뜻을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열 번, 스무 번 되풀이해 읽었습니다. 

 

 

 

 

원효대사가 지은 절 초개사와 사라사

황룡사에는 일 년 내내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찾아왔습니다. 조용히 불경을 공부하기에는 좋은 장소가 아니었지요. 마침내 원효대사는 고향인 압량 고을 불지촌으로 돌아와서 자기 집을 없애고 그 위에다 절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불렀는데, 불교를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뜻이 들어 있지요. 원효대사가 덕행이 높고 불경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설법도 아주 잘 하는 스님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온 나라에 퍼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원효 대사의 설법을 듣기 위해 초개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갔지요. 원효는 생각다 못해 마을에 새로 절 한 채를 짓고 '사라사' 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찾아오는 많은 이들을 위해 이 곳에서 설법을 했습니다.

 

당나라로 간 원효대사

원효대사는 수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불법을 가르치며, 자신의 배움과 수련이 부족함을 깨달아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 대사가 원효를 찾아와 불법을 완전히 배우고 익히려면 당나라로 가시지 않겠냐 물었지요. 당나라는 인도와 거리가 가까워 불교의 역사가 깊어 당시에 뜻있는 스님들은 모두 당나라로 유학 가는 것을 유행처럼 여겼습니다. 진덕 여왕 4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나라를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

어느 날, 날이 저물어 가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 피할 곳을 찾아 빈집으로 들어갔고 며칠째 걸은 탓인지 두 스님은 앉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빗줄기는 서서히 약해졌꼬 주위는 짙은 어둠이 내려앚았지요.  

 

원효는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눈을 뜨게 되었고 주위의 어둠 때문에 물을 찾아 더듬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그릇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습니다. 목마름을 채운 원효대사는 다시 잠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뜬 원효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지난밤 잠을 잤떤 곳은 여기저기 흉측한 해골들이 나뒹구는 빈 무덤 속이었던 겁니다. 원효는 머리 맡의 해골 속에 고여 있는 시커멓게 썩은 물을 발견하고는 구역질을 했고 걱정하던 의상대사에게 어젯밤 일을 말해주었지요. 두 스님은 할 말을 잊은 채 서둘러 무덤을 나와 걷기 시작했습니다.

 

 

 

원효대사 깨달음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었으나 목적지는 멀기만 하여 결국 주막집에서 또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젯밤 무덤 속에서 마신 썩은 물 때문이었지요.

'허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는가! 해골 속에 고여 있떤 물을 마시다니, 그런데 그 썩은 물이 왜 그리 달고 맛이 있었을까?' 원효대사는 지난밤에 썩은 물을 마시기 전과 그 물을 마신 후의 자신의 마음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달고 맛있었떤 물이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는 건 왜일까?'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하다가 원효는 그만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우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원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모든 판단은 마음에서 생긴다고 했다. 목이 마를 때에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도 달고 시원하다 생각했는데, 그 물이 썩은 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구역질이 났지. 더럽고 깨끗하다는 것, 이 모두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난 원효가 의상대사에게 당나라에 가는 것을 그만두겠다 말했습니다. 불법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굳이 당나라에 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요. 원효대사는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고향 초개사로 돌아왔습니다. 초개사로 돌아온 원효대사는 예전의 계율을 엄히 지키고 말과 행동을 조심히 하는 원효대사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인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어기기도 하고 술집에도 스스럼없이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고기와 술까지도 먹고 마셨습니다. 원효대사의 참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원효대사의 얼굴에는 위엄과 자비가 더욱 넘쳐흘렀습니다. 원효대사의 마음속에는 옳은 것과 틀린 것이 없고 길고 짧은 것이 없으며, 좋고 싫은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아유타

하루는 원효가 길거리에서 큰 소시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을 터인데."

사람들은 이 노래의 뜻을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노래에 대한 소문이 무열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윽고 원효대사가 주인없는 여인에게 장가를 들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한다는 속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무열왕은 주인없는 여인이 남편이 죽고 없는 여인이라 생각하여 요석공주 아유타와 원효대사를 맺어주기로 마음먹고 신하를 시켜 원효대사를 모셔 오도록 했습니다.

 

임금의 명으로 원효대사를 찾아 나선 신하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마침 원효대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효대사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가 싶더니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놀란 신하는 급히 원효대사를 물에서 건져 주었습니다. 사실 원효대사는 대궐에서 나온 신하를 알아보고 일부러 물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요석궁의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겁니다. 무열왕은 원효대사를 옷도 말려야 하니 우선 요석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 무렵 요석궁의 아유타 공주는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고 있었는데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원효대사의 설법을 들으러 갔다가 그만 대사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주의 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어 속만 태우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효대사와 공주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고 드디어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가에서 스님이 장가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원효는 그러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공주와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

그러던 어느 날, 원효대사는 공주에게 참으로 행복했으나 부처님의 뜻에 따라 중생을 깨우쳐야 하는 몸이라며 궁을 떠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석 공주에게 아기가 생겼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설총입니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였습니다.  

 

원효대사는 장가를 들어 불자의 계율을 어겼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를 '소성 거사'라 했습니다. 그 후에 도를 닦고 책을 지으며 보내다 육십구 세에 혈사(토굴 속에 있는 절)에서 입적(불교에서 수도승의 죽음) 하였습니다.

 

45세 이후 원효대사가 머문 경주 분항사 모전 석탑

 

***원효대사의 성이 설씨 라서 자녀의 이름이 설총입니다.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경산군 자인면 부근인데 압량군 불지촌이라 했지요. 이곳에 있는 삼성산은 원효와 설총, 일연이 태어난 곳이라 삼성산이라 불린다는 얘기가 있답니다.

 

궁에서 떠난 후 무애가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민중들에게 불법을 가르치고 교화하여 무지한 사람들도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어 불법에 의한 구제를 받도록 하였지요.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유해를 서라벌로 모셔다가 크게 장사를 지냈고 화장한 재를 흙과 섞어서 생전의 모습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그 모형을 분황사에 모셔 놓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슬픈 뜻을 표하였는데, 모형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원효대사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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