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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시대의 왕들 ▶고려 제2대왕 혜종(태자 무) 혜종은 왕건의 맏아들이자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입니다. 혜종은 태자시절 후백제를 정복할 때 큰 공을 세웠을 정도로 용맹했으며 덕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왕건의 걱정대로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하여 세가 약했고 태어났을 때부터 얼굴에 주름이 많다 하여 '주름살 임금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왕건의 셋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요와 소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 외가 쪽의 세력도 막강해 혜종에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왕건은 태자 무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이 큰 왕규와 김긍률의 딸을 태자와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왕규의 또다른 딸은 태조 왕건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왕규는 현재 왕인 혜종의 장인보다 태조 왕건과 결혼하여 낳은 손주가 왕이 되어 왕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더 ..
후삼국시대와 고려를 건국한 왕건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신라의 멸망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신라가 되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내부의 문제로 더욱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계급사회로 인해 성골과 진골 그 외 귀족들까지 서로 권력을 키워나가려고 헐뜯고 싸워댔습니다. 그 틈을 타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은 농사지을 땅까지 빼앗기자 도적이 되거나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발 빠르게 움직인 세력들이 바로 지방세력인 '호족'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왕이나 고위관리는 되지 못했지만 사병을 거느릴 수 있었고 재력 또한 갖추었으며 그 지방에선 왕처럼 군림하였습니다. 떠돌이 백성이나 굶어가는 백성들을 모아 사병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이 혼란을 틈타 지금의 광주인..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고구려 유민이 된 대조영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남쪽은 통일신라가 지배하였지만 고구려 땅이었던 북쪽은 신라와 연합하여 삼국통일에 도움을 준 당나라가 차지했습니다. 당나라는 평양에 고구려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안동 도호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고구려의 부흥을 막기 위해 고구려인들을 흩어져 살게 하고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때 대조영 일가도 요서 지방의 영주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이주한 곳에서 거란족, 말갈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거란족과 말갈족 역시 당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거란과 말갈족 역시 살던 곳에서 쫓겨나 강제 이주당한 상태였습니다. 그 해에 극심한 가뭄이 일어 한 해 농사를 망치자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힘겹게 살고 있었습니다. ..
고구려 광개토대왕 고구려 최고의 정복자 광개토대왕 ▶고구려를 발전시킨 왕 고구려 17대 임금 소수림왕 때 일입니다.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며 정치적 체계와 문화 발전에 힘썼습니다. 특히 소수림왕 2년(372년)에 태학과 경당을 세워 유교와 무술을 배우도록 하여 인재를 양성한 것이 큰 업적이었습니다. 또한 관습만 있고 법이 없어 소수림왕 3년(373년)에 율령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나라의 법을 알렸습니다. 당시 고구려에는 여러 신앙들이 있었는데 백성들을 단합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재위 5년(375년)에 초문사와 이불란사 라는 절을 지어 순도와 아도에게 불교를 전파토록 했습니다. 소수림왕이 세상을 떠날때 아들이 없어 동생인 이련이 고구려 18대 임금인 고국양왕이 되었는데 고국양왕은 4만의 군사를..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바보온달과 울보 평강공주 고구려 25대 임금인 평원왕이 다스릴 때의 얘기입니다. 온달은 성품은 착하나 늘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고 얼굴도 못생겨서 놀림을 받았고 한번도 화를 내는 일도 없어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온달은 가난했기 때문에 밥을 얻어 어머니를 모셨고 온달의 어머니는 앞이 보이지 않아 온달이 없으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평원왕은 어린 공주가 낮이나 밤이나 매일 울어대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럴때마다 평원왕은 공주가 울때마다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꾸짖었지요. 공주가 그 얘기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쳤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평강공주가 어느새 16세가 되어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평원왕은 혼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좋은 신랑감이 있어 혼사를 치르자..
신라화랑 김유신 일화 2 ▶김유신과 김춘추 화랑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로서 용모와 언변이 뛰어나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사냥터에서 김유신과 마주쳤는데 서로 유명한 화랑임을 알아보고 친분을 쌓게 됩니다. 그들의 목표는 둘 다 삼국통일으로 같았기에 수련에 정진하며 우애를 쌓았습니다. 진평왕 54년(632년)에 진평왕이 죽고 성골 출신 귀족 중에 남자가 없어 대가 끊기는 상황이 되자 신라 27대 임금은 덕만공주가 왕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바로 최초의 여왕이 된 선덕 여왕이었습니다. 김유신은 성골 출신의 대가 끊겨 선덕여왕의 사촌 여동생 승만 공주(진덕여왕) 외에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으니 진지왕의 친손자인 김춘추가 왕이 될 것을 예견하였고 자신의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실제로 훗날 김유신..
신라 삼국통일 초석을 다진 진흥왕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진흥왕 진흥왕은 신라 제24대 임금으로 지중왕의 손자입니다. 540년 7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에 올라 그의 어머니인 식도 부인(법흥왕의 딸)이 섭정을 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왕이 어릴 때는 왕의 어머니가 섭정 또는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진흥왕은 훗날 신라의 장군 거칠부를 시켜 국사를 편찬하게 했고 화랑제도를 만들었으며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널리알려 보급하였으며 순수비를 세워 나라에 공을 세운이 들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관회와 연등회등을 베풀어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희생을 알아주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봤을 때 많은 문화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전쟁과 화랑 사다함 진흥왕은 고구려의 정치가 혼란한 틈을..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견훤의 어린 시절 일화 옛날 상주 가은현(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이라는 고장에 아자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자개는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출세하여 사불성에서 장군이 되었습니다. 아자개는 아들 넷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맏아들 견훤은 남보다 재능이 뛰어나고 똑똑하였습니다. 견훤이 젖먹이 아기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견훤의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견훤을 숲 속의 큰 나무 아래에 잠시 뉘어 놓고 밭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밥을 날라 주러 갔습니다. 얼마 후에 슬슬 배가 고파진 견훤은 어머니가 안 오자, 막 울음을 터뜨리려 했습니다. 이 때, 숲 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훤에게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젖을 아기 견훤에게 물렸습니다. 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