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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과 삼천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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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이 된 의자왕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사람들은 당시에 그를 '해동의 증자'라고 불렀습니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가리키고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의자왕이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 초에는 나라의 일을 잘 돌보았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중국과의 외교도 다져 나갔고 지방을 다니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을 다시 심사해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임금께서 참 공평하시고 죄가 가벼운사람,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보살펴 주시니 더 열심히 살면서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며 우러러 봤습니다.


신라와의 전쟁


의자왕은 이웃 신라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공격을 했습니다. 즉위 2년 가을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성을 미롯한 40여 개의 성을 항복시켰습니다. 윤충장군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 백제와의 접경 지대인 신라 서부 지방의 핵심 요새)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 대야성의 성주는 김품석(당시 신라 왕실의 실권자인 김춘추의 사위) 이었는데 그의 부하인 검일이 백제군과 몰래 내통하였습니다. 검일은 자신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긴 원한을 갚기 위해서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가 곳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한밤중에 잠을 자던 군사들은 갑작스러운 불길에 우왕좌왕했고 성 안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 버렸습니다.


결국 대야성의 성주는 오래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대야성을 빼앗은 다음 해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점점 커 가는 신라의 세력에 맞섰습니다. 바로 군사를 동원해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남양)을 공격한 것입니다. 신라와 당나라를 연결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선덕 여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는 말을 듣자, 일단 군사를 철수시켰어요. 이 틈을 타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는 백제 변경의 7개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의자왕은 당이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 신라 군사를 데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빼앗긴 7개성을 다시 차지했습니다. 그 후 몇년 동안 밀고 밀리는 신라와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의자왕의 타락


의자왕은 651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때마다 예물을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사신 편으로 당나라 고종의 편지가 전해졌습니다. 편지에는 '왕이 빼앗은 신라의 성들을 전부 돌려주고 신라 또한 그대 나라의 포로들을 돌려보내도록 명령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신라가 백제와 싸우도록 내버려 둘 것이며, 고구려 왕에게 그대를 돕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라고 써있었습니다.


의자왕은 일단 한 발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655년 다시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격파하였고 신라전의 승리에 자만한 왕은 이 때부터 나라일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향락을 가까이하며 간신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2월에는 태자의 궁을 화려하게 수리하였고, 궁궐의 남쪽에는 망해정이라는 정자를 세웠습니다.


어느 날, 충신인 성충이 고하길 자주 놀이를 즐기시는데 예로부터 즐기다가 나라를 망치지 않은 임금이 없다 하였습니다. 성충의 말에 의자왕은 크게 화를 내며 성충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옥중에서도 성충은 자나깨나 나라일을 걱정하다가 그만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임금을 향해 붓을 들어 신라와는 반드시 전쟁이 있을 터, 강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우리 군사를 보호할 수 있으니 만일 적의 군사가 오거든 육지로는 침현(지금의 충남 대덕군 마도령)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지금의 충남 서천군 장항읍 일대)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절대로 적이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 고하였습니다. 그 후 성충은 삶을 마감하였는데 의자왕은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길한 백제의 운명


하늘도 왕의 타락과 기울어 가는 백제의 운명을 알았는지 659년, 궁궐을 비롯한 나라 안의 곳곳에서 해괴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여우 떼가 궁궐에 몰려와서는 그 중의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백제 16관등 중 1등급인 좌평의 우두머리로 수상격)의 책상에 올라앉았는가 하면, 또 밤마다 대궐 남쪽 큰길에서 귀신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궁궐은 삽시간에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660년 2월, 사비성(지금의 부여의 부소산성)의 여인들이 우물물을 길으러 왔다 우물물이 온통 피처럼 붉은걸 발견했습니다. 한편, 바닷가에서는 작은 물고기들이 죽은 채 수없이 물 위로 떠올랐고 4월에는 수만 마리의 두꺼비가 나무 꼭대기에 모여 시끄럽게 울어대는 등 자연재해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또한 성 안의 사람들이 까닭도 없이 놀라서 우르르 몰려가다가 넘어져 백여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도둑맞은 집도 헤아릴 수 없었는데 혼란한 틈을 타서 도적 떼가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황산벌 전투


660년,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에게 13만의 군사를 내주며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또한 신라 왕 김춘추도 5만의 군사를 보내고 당군과 합세시켰습니다. 그에 의자왕을 비롯한 나라의 중신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했는데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좌평 의직은 "당나라군은 멀리 바다를 건너온데다 물에 익숙치 못하니 그들이 상륙하여 기운을 회복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의견을 내자 , 달솔 상영 측에서는 반대의 의견을 내놓으며 당나라보다 신라군을 쳐서 기세를 꺽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의자왕은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멀리 귀양가 있는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방법을 물었는데 "백강과 탄현을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할 때를 기다려 적을 치는 것이 옳습니다"라는 답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당나라와 신라군은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은 왕은 급히 계백을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계백은 신라군을 막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계백은 출전을 앞두고 결사대와 굳은 맹세를 했습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죽기를 각오한 백제군을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넓은 황산벌에는 계백의 결사대와 신라군과의 죽음의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계백과 5천의 결사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제 백제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앞의 등불' 이었습니다.


의자왕은 모든 것을 왕자들에게 맡기고 태자 효와 함께 웅진으로 피하였습니다.

이때 의자왕의 3천 궁녀가 절벽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그 바위를 낙화암이라 불렀습니다.



백제의 멸망


당의 소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의 둘째 왕자인 태는 스스로 왕이 되어 사비성을 지켰으나, 열흘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의자왕도 곧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소정방은 백제에 5도독부(군정을 맡은 지방 관청)를 설치하고 유인원 장군과 군사 1만을 남기고는 의자왕과 태자, 백성 일만 삼천여 명을 잡아 당으로 돌아갔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후,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에서 왕자 풍을 왕으로 받들고, 임존성에서 가세한 흑치상지와 지수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라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이들은 사비성을 도로 빼앗는 듯하였지만 그만 지도층에 싸움이 일어났고 고구려와 일본에 원군을 청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백강 입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풍과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나 버렸고, 4년간 계속되어 왔던 백제를 되살리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됨으로써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계백일화


계백은 황산벌 전투에 나가면서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며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였습니다. 무섭고 잔인하긴 하지만 그런 의지로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때 장군 품일은 신라의 화랑인 16살 아들 관창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이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습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출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지만 다시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습니다.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묶어 진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을 계기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마침내 전사하였습니다. 영화 '황산벌' 에서는 신라의 장군들이 서로 앞다투어 화랑인 자신의 아들들을 전투에 내보내기도 했었지요.



***삼천 궁녀


백마강 및 절벽단애를 이루는 낙화암은 충남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백제 678년의 사직이 무너지던 날, 왕을 모시던 궁녀들이 굴욕을 피하고자 이 곳 바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졌기에 타사암이라고도 합니다. 낙화암은 뒷날 궁녀를 꽃에 비유하여 미화한 이름으로 보기도 합니다. 


낙화암의 바위 꼭대기에 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백화정이란 정자를 세웠습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낙화암에서 떨어진 3천 명의 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던 백성들과 병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데다, 패배한 의자왕의 방탕함을 확대하기 위해서 과장한 이야기라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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