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대비한 계백장군
계백은 백제 의자왕(백제의 마지막 왕) 때 장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날마다 산과 들을 누비며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 여러가지 무술을 갈고 닦았습니다. 소년답지 않은 강한 의지와 튼튼한 몸, 게다가 지혜까지 뛰어나 전쟁놀이에서 항상 대장 노릇을 했지요.
계백은 청년이 되자 무예원(무술을 가르치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예원의 스승들은 무술뿐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올바른 인간이 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계백은 어른이 되면 훌륭하고 용감한 장군이 되어 백제를 침입해 땅을 빼앗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신라에 대항할 것이라 다짐했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젊지만 효성이 깊고 용맹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향락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상한 소리가 들려 땅을 파게 했는데 신기하게도 등에 글이 쓰여진 거북이 나왔지요.
'백제는 보름달이요, 신라는 초승달 같다.'
의자왕은 무당에게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보름달은 이미 다 찬 것이니, 이제 곧 기운다는 뜻입니다."
화가 난 의자왕은 그 무당을 죽이고, 다른 무당을 불렀습니다.
"보름달은 풍성함을 나타내니 백제는 더욱 번창할 것입니다."
의자왕은 기뻐하며 무당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의자왕은 듣기 좋은 말만 믿으려 했으며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충신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한강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신라와 백제의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 갔습니다. 계백 장군은 신라에 보낸 첩자를 통해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아 냈습니다. 계백장군이 의자왕께 아뢰었지만 왕은 무당의 말을 믿고 백제가 번성할 진데 뭐가 걱정이냐며 계백장군을 비웃었지요. 계백장군은 마음이 답답했지만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백장군은 조용히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식량을 모으게 하고 군사 훈련을 계속하도록 했습니다.
▶신라의 침략과 황산벌 전투
이윽고 당나라 군사들이 백강(지금의 금강)에 도착했고 신라의 군사들이 국경을 넘었다는 다급한 소식이 백제의 진영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백제 군사들은 적군의 침략 소식에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던 계백장군은 침착하게 군사들을 독려하며 맞서 싸울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의 적들이 쳐들어 오는 데에 놀란 백제의 군사들은 불안감을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계백장군은 부족한 군사와 백제의 상황에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백제의 거리에는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칼을 찬 계백 장군은 가족이 있는 집에 들어섰습니다. 부인과 아이들이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계백장군은 비통한 얼굴로 가족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니 백제의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구나. 이 아비는 적과 싸우다 기꺼이 죽을 것이다. 내 가족들은 짐승 같은 적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어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계백장군의 말에 부인과 아이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장군이 칼이 번뜩일 때마다 가족들은 쓰러져 갔습니다. 계백장군은 눈물을 삼키며 집을 불태우고 전쟁터로 향했습니다.
백제 진영으로 돌아온 계백장군은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옛날 월나라의 구천은 겨우 오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 부차의 70만 대군을 물리쳤다! 우리도 한 사람이 적군 천 명을 당해 내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써 나라가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하자!"
장군의 굳은 의지에 백제의 군사들도 용기가 났습니다. 백제군은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서 적군을 기다렸습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오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백제군은 고작 오천 명이었지요. 또한 신라군을 도우러 당나라군까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군은 침착하게 적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예상대로 신라군은 세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먼저 궁수 부대의 화살이 백제의 진영으로 날아들었고, 잠시 후 오른쪽에 있던 기병부대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양쪽 군사들이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누고 거리가 좁혀진 군사들은 칼을 빼어 들고 육박전을 벌였습니다. 황산벌은 금세 군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죽을 각오를 다진 백제군의 기세에 신라군도 곧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랑 관창과 백제 충신 계백장군
신라군은 네 차례나 더 백제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많은 군사를 잃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라의 김유신은 장군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이때, 한 장군이 자신의 아들인 화랑 관창으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게 하여 신라군의 떨어진 사기를 높이겠다 하였지요.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관창의 용맹스러움에 김유신도 관창을 적진으로 보냈습니다.
화랑 관창은 용감하게 백제 진영으로 달려갔지만 백제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창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말에서 내려 칼을 빼어 들었지만 칼마저 부러져 백제군에게 잡혔지요. 계백장군에게 끌려가 투구를 벗었는데 앳된 관창의 얼굴을 보고 계백은 아직 어린 관창을 죽이고 싶지 않아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어린 화랑을 보낸걸 보고 오히려 백제군에선 신라군을 비웃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때, 관창이 다시 백제 진영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결국 다시 백제 군사들에게 잡혀 계백장군에게 끌려오게 되었지요. 계백장군은 어린 관창을 불쌍히 여겨 살려 주었건만 왜 다시 왔느냐 물으니, 관창은 날 죽이지 않으면 또다시 올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계백은 이렇듯 용감한 젊은이를 가진 신라는 뜨는 달이오, 노장밖에 갖기 못한 백제는 지는 달이냐며 탄식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계백장군은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묶어서 신라의 진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말에 실린 관창의 시신을 본 신라 군사들은 어린아이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며 관창의 원수를 갚고자 백제 진영으로 달려나갔습니다.
▶백제의 멸망과 계백의 죽음
수많은 화살이 황산벌의 하늘을 가득 메웠고 시간이 갈수록 백제의 군사들은 그 수가 줄었습니다. 결국 백제의 군사들은 모두 황산벌에서 싸늘하게 쓰러져 갔지요. 계백장군은 적의 칼날이 심장을 찔러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도 백제의 운명을 걱정하고 아쉬워했습니다. 계백장군이 그러했듯이 백제의 군사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도 항복하지 않았고 이 일로 하여금 황산벌 싸움은 백제의 패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게 되었습니다. 뒤이어 백제의 수도가 신라군에게 점령당하고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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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과 삼천궁녀
백제의 왕이 된 의자왕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사람들은 당시에 그를 '해동의 증자'라고 불렀습니다. <해동은 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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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계백의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철의 표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예로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는 백제의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사당인 삼충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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