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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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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어린 시절 일화

옛날 상주 가은현(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이라는 고장에 아자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자개는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출세하여 사불성에서 장군이 되었습니다. 아자개는 아들 넷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맏아들 견훤은 남보다 재능이 뛰어나고 똑똑하였습니다.

 

견훤이 젖먹이 아기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견훤의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견훤을 숲 속의 큰 나무 아래에 잠시 뉘어 놓고 밭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밥을 날라 주러 갔습니다. 얼마 후에 슬슬 배가 고파진 견훤은 어머니가 안 오자, 막 울음을 터뜨리려 했습니다. 이 때, 숲 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훤에게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젖을 아기 견훤에게 물렸습니다. 견훤은 천연덕스럽게 호랑이의 젖을 먹어 배를 채웠답니다.

 

돌아온 어머니는 호랑이가 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고 어머니의 기척을 알아낸 호랑이는 쏜살같이 달려 깊은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급히 견훤에게 달려갔습니다. 호랑이의 젖을 먹고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진 견훤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가 견훤에게 젖을 먹인 일을 듣고는 모두들 신기한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견훤은 날이 갈수록 쑥쑥 자라 몸집이 우람하게 크고, 생김새가 남달랐습니다. 그리고 성격 또한 활달하여 어디서나 눈에 띄는 아이였습니다.

 

 

 

신라의 군인이 된 견훤

견훤은 자라서 군인이 되어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있다가 남서쪽 바다를 지키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늘 해안을 철저히 살피며 적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동료 군사들은 훤의 성실함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견훤은 매우 용감하여 병사들 중에서 언제나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 공로로 훤은 비장(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리직)이 되었습니다.

 

이 때 신라는 진성여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진성여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이 왕의 곁에 있으면서 나라일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 어지러워졌지요. 게다가 농사까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거지 신세가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도적과 반란군이 벌 떼처럼 일어났습니다.

 

견훤은 신라의 형편이 이러한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신라는 썩을 대로 썩어서 다시 일어날 희망이 없어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고 있으며 누군가 용감한 사람이 신라의 왕족과 귀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이끌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견훤 본인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을요.

 

견훤의 후백제 건국

견훤은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 신라의 서울 남서쪽에 있는 고을들로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견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 달 만에 견훤의 밑에 있는 무리가 5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견훤은 무진주(전라남도 광주 지방)를 쳐서 손에 넣은 다음에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견훤은 본래 성이 이씨였지만 이때 스스로 성을 견으로 바꾸었습니다.

 

견훤이 서쪽 지방을 돌아보러 다니는 중에 완산주(전라북도 전주)에 이르렀습니다. 이 곳 사람들은 견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견훤은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곁에 있는 신하에게, 이 곳은 예전에 백제의 땅이었지만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불러들여, 김유신의 군사와 당나라 군사가 힘을 합쳐 백제를 쳤고 결국 백제는 나라를 세운 지 6백 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견훤은 잠시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 이곳 완산주를 도읍으로 하여 백제를 세우겠다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 고장 사람들이 옛날 백제의 후손들이니 백제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시 세운다면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따를 것이라 아뢰었지요. 드디어 견훤은 900년에 후백제라는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자신을 후백제의 왕이라 하였습니다.

 

 

 

후백제와 고려의 전쟁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동북쪽에서는 왕건이라는 사람이 918년 철원에서 왕이 되어 '고려'를 세웠습니다. 견훤은 그 소식을 듣고 고려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견훤이 보낸 사신은 고려에 가서 왕건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무너져 가는 신라를 사이에 두고 새로이 세워진 후백제와 고려가 힘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견훤은 고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살피다가 서서히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925년 추운 겨울에 견훤이 말 탄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조물성에 닿았습니다. 왕건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조물성에서 견훤과 왕건의 군사가 마주 겨루게 되었는데 쉽게 승부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왕건이 싸움을 멈추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내용의 글을 견훤에게 보내었고 왕건과 견훤은 서로의 친척을 볼모로 보내어 화해했습니다.

 

1년 후,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견훤이 왕건에게 볼모로 보낸 친척인 진호가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였고 화가 나서 고려에서 볼모로 보낸 왕신을 즉시 가두라 명했습니다. 후백제와 고려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참이었습니다.

 

신라의 멸망

이 무렵, 신라의 임금은 희망을 잃고 신하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신라는 다시 일어서기 힘드니 고려와 좋은 관계를 맺자고 하였고 신하들도 찬성하였지요. 이 사실을 안 견훤은 자기가 신라를 손에 넣기 전에 고려가 먼저 차지할까 봐 걱정하여 서둘러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927년에 후백제군 신라의 서울 근처에까지 진격하자 신라는 고려에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고려의 왕건은 신라에 군사를 보내 주었지만 견훤은 왕건의 군사가 오기 전에 재빨리 신라의 서울로 쳐들어갔습니다. 이 때 신라 경애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에 나가 놀고 있다 도망쳤습니다.

 

견훤은 도망간 경애왕을 잡아 와 능력이 없고 타락하여 왕으로서 자격이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새로운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라 말했지요. 경애왕은 별수 없이 견훤의 말대로 자결을 하였습니다. 견훤은 경애왕의 친척 아우뻘 되는 김부(경애왕-신라마지막왕)가 신라의 왕위를 잇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왕건에게 항복해 신라는 멸망하였습니다.

 

 

 

견훤과 왕건의 싸움

견훤은 신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팔공산 아래에서 길목을 막고 기다리고 있던 왕건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견훤은 왕건의 5천 명 군사에 맞서 싸웠고 승리를 하였지요. 왕건은 간신히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견훤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대목성(경상북도 칠곡 지방)을 쳐서 빼앗았습니다. 견훤은 왕건에게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라가 그대를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약한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다치게 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의 강한이 뚜렷하니 누가 이길지 뻔하다.  황새와 조개가 맞겨룬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스스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

종달새는 신라와 고려를 비유한 것이고 매는 후백제를 비유한 것이지요. 왕건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당장 견훤에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처음에 상대방을 얕보고 달려들어왔으나, 이는 모기가 산을 등에 짊어지는 것과 같았소. 내가 군사를 일으킨 후로 땅의 싸움에서는 번개가 번뜩이고 벼락이 치듯 빨랐으며, 물의 싸움에서는 호랑이가 활개를 치고 용이 하늘로 오르듯 하였소. 만약 당신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 없을 것이오."

 

그 후로 견훤과 왕건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견훤이 운주로 갔을 때 고려의 유금필 장군의 활약으로 인해 후백제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30여 개의 성이 고려에 항복하여서, 운주 싸움의 패배로 후백제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아들 신검에게 배신당한 견훤과 후백제의 멸망

그러나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견훤의 집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견훤의 첩들이 많아서 십여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견훤은 그 중 넷째 아들 금강을 특별히 사랑하여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요. 금강의 형인 맏아들 신검과 양검, 용검은 그것을 알고 몹시 속을 태웠고 견훤의 부하인 능환이 양검과 신검을 부추겨서 견훤을 왕위에서 끌어내릴 계획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강제로 금산사(전라북도 김제 소재)로 옮겨 가 있게 한 뒤에 서른 명의 장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습니다. 그 후 신검은 왕이 되었습니다. 석달 후, 견훤은 감시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술을 잔뜩 먹여서 취하게 한 뒤에 도망 나와 왕건에게 갔고 왕건은 견훤을 공손히 대하여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견훤은 괴로운 마음으로 왕건의 힘을 빌려 역적 자식을 벌하기 위해 왔다 말하였습니다.

 

이에 왕건은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후백제로 갔습니다. 고려의 군사는 일선(경북 선산지방) 땅에서 신검의 군사와 마주하게 되었고 전쟁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검 또한 항복하여,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결국 4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견훤은 사라진 후백제를 생각하며 울화를 이기지 못해 병을 얻어 70세의 나이로 황산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견훤이 신라로 쳐들어갔을 때 신라의 왕이었던 경애왕이 부인과 신하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놀고 있었던 것은 유명한 얘기입니다. 포석정은 경주 남산 아래 서쪽 기슭에 있는 임금의 놀이터로 통일 신라 이후에 역대 임금과 귀인들이 이 곳에서 술잔을 전복 모습으로 둥글게 판 홈에 띄워 놓고 놀이를 즐겼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홈이 파인 곳에 물이 흐르고 물 위에 술잔을 얹어 다른 이에게 전달합니다. 나라가 어렵고 백성들의 난이 끊이지 않던 때인데 왕은 놀고 있었던 것이지요.

 

신라는 150여 년 사이에 20여 명이 왕이 바뀔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데다 왕과 귀족들의 사치와 타락으로 세금을 가혹하게 걷어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을 이끌면서 버젓이 영토를 확보하고 나라를 세운 이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견훤과 궁예, 왕건이었고 이들이 세운 나라를 후삼국이라 합니다. 결국 왕건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고려 왕조를 열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지요.

 

게티 이미지 뱅크 - 경주 포석정

 

후백제 견훤이 쌓았다 전해지는 원주의 견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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