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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 삼국통일 초석을 다진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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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진흥왕 

진흥왕은 신라 제24대 임금으로 지중왕의 손자입니다. 540년 7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에 올라 그의 어머니인 식도 부인(법흥왕의 딸)이 섭정을 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왕이 어릴 때는 왕의 어머니가 섭정 또는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진흥왕은 훗날 신라의 장군 거칠부를 시켜 국사를 편찬하게 했고 화랑제도를 만들었으며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널리알려 보급하였으며 순수비를 세워 나라에 공을 세운이 들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관회와 연등회등을 베풀어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희생을 알아주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봤을 때 많은 문화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전쟁과 화랑 사다함

진흥왕은 고구려의 정치가 혼란한 틈을 타 고구려가 백제를 도울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14년(552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았습니다. 백제의 성왕 때 일입니다. 성왕은 억울하였으나 신라가 강하니 어쩔 수 없이 화친 정책을 제안하며 신라를 안심시키려 했습니다.  

 

진흥왕은 백제 성왕의 화친정책을 믿지 않고 의심하여 명활성을 꾸준히 수리하며 방어를 준비했습니다. 진흥왕의 우려대로 백제 성왕은 신라로 쳐들어왔고 이때, 금관가야의 왕자였던 김무력(금관가야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 용맹하고 지기가 높아 어린 나이였지만 지휘자로 나섰고 큰 승리를 거둬 백제는 불리해졌습니다. 김무력은 신라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전쟁터에서 백제의 태자가 병이 나 백제 성왕이 직접 전쟁터로 왔다가 신라군에 붙잡혀 목숨을 잃고 백제는 패했습니다.

 

진흥왕은 김무력이나 이사부등 훌륭한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화랑도'를 만들게 되었고 백제 성왕의 복수를 위해 위덕왕이 보낸 백제군에 화랑인 사다함을 보내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진흥왕은 사다함에게 큰 상을 내렸으나 사다함은 계속 거절하였으며 몇백 명의 노비들까지 모두 풀어 주고 땅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 얘기가 퍼져 백성들은 사다함을 더 칭송하고 화랑을 높이 우러러 봤다고 합니다.  몇 년 후 사다함은 어렸을 때 죽음을 함께하자 맹세한 친구 무관랑이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로 병에 걸려 죽자 7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피 울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17세의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화랑도 초기의 원화

진흥왕은 처음 화랑들의 교육을 위해 귀족 출신 처녀 두 명을 단체의 우두머리로 뽑아 젊은이들을 수련시키는 '원화'를 만들어 받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두 원화는 서로 아름다움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다른 원화를 죽이는 일이 발생했고 이 일을 계기로 300여 명의 젊은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에 진흥왕은 기존의 화랑도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체계화 했고 화랑은 점차 신라의 중요한 인재 양성 집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진흥왕은 37년(576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신라 25대 임금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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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화랑도

화랑도 화랑도는 신라시대의 청소년들이 모여 수양을 쌓던 단체입니다. 화랑들은 평상시에는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과 무술을 닦으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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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과 가야금

우륵은 원래 대가야의 사람으로 왕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신라의 악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1년 12달을 상징하는 12줄의 현금(거문고)를 가야에서 만든 거문고라는 뜻에서 가야금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가야금 연주곡으로 우륵은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대가야가 힘을 잃어 562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 우륵은 신라로 이주를 했고 신라땅을 순방 중이던 진흥왕에게 그 명성이 알려져 진흥왕의 명으로 가야금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야금이 신라의 궁중 음악이 되고 가야금은 거문고, 비파와 함께 3대 현악기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북한산 순수비

진흥왕때 백제의 땅이었던 한강유역을 차지한 다음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인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넓어진 신라땅을 매우 흐뭇해하며 그곳에 신라의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것이 북한산 '순수비'입니다. '순수'란 임금이 나라 안을 돌아 살핀다는 뜻으로 북한산 말고도 가야를 정복하고 창녕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북한지역의 함경에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단양에는 적성비, 울진의 봉평에 신라비를 세웠습니다.

 

순수비에는 신라의 영토는 물론, 수행했던 신하들의 관등과 출신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신라의 정치.사회와 계급을 알게 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북한산 순수비라고 하니까 실제 북한산에 있는듯 생각되었는데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북한산 순수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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