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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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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이 된 대조영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남쪽은 통일신라가 지배하였지만 고구려 땅이었던 북쪽은 신라와 연합하여 삼국통일에 도움을 준 당나라가 차지했습니다. 당나라는 평양에 고구려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안동 도호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고구려의 부흥을 막기 위해 고구려인들을 흩어져 살게 하고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때 대조영 일가도 요서 지방의 영주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이주한 곳에서 거란족, 말갈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거란족과 말갈족 역시 당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거란과 말갈족 역시 살던 곳에서 쫓겨나 강제 이주당한 상태였습니다. 그 해에 극심한 가뭄이 일어 한 해 농사를 망치자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힘겹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거란 추장 이진충은 유민들을 이끌고 영주 도독 '조홰'를 찾아가 먹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주 도독은 거란 추장을 매질하여 쫓았고 이 일로 하여금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해 696년 거란의 유민들은 추장 이진충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대조영

백성들의 배고픔을 외면하던 영주 도둑 조홰는 성난 거란의 유민들에게 맞아 죽었고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 유민 대조영은 곧바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비록 거란 추장 이진충은 당나라군에 잡혀 사망했지만 대조영은 그들에게서 큰 용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대조영이 고구려가 망하기 전까지 장군이었고 그의 패기에 다른 부족들까지 모와 힘을 합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백두산 동북 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측천무후는 화가났지만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 대조영과 걸사비우에게 높은 벼슬을 주겠다며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반란을 막으려 꾀를 내었지만 대조영은 거절하였고 결국 산세가 험한 천문령 골짜기에서 힘겨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대조영은 이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지만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가 당나라군의 화살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698년 당나라군을 물리친 대조영은 길림성 돈화현 동무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진나라가 바로 발해이고 고구려가 패망한지 30년 만에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남쪽은 신라가 북쪽은 발해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주를 이루었기에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곳이 당나라인 타국에 빼앗긴 현실을 슬퍼하며 고구려 정신을 이어받아 지켜 나가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당나라에 항거했으나 나중엔 차츰 교류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와는 전략적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신라 또한 발해에 대해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한 뒤, 북진 정책을 위협하던 돌궐족과 손잡고 당에 대한 견제 세력을 튼튼히 쌓아 나갔습니다. 그러자 705년 당나라는 사신 장행급을 발해로 보내 화해를 청했습니다. 이에 대조영은 아들 대무예를 당나라로 보내 임금을 만나게 함으로써 화친을 하게 되었습니다.

 

713년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봉해지면서 진나라를  발해라고 고쳐 불렀고 스스로 '고왕'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운 지 21년 뒤인 719년 세상을 떠나, 앞으로 대를 이을 왕들은 고구려 정신을 잊지말고 계승하라고 당부했다 합니다.  

 

해동성국 발해시대

왕위를 계승한 무예 세자가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고 고구려 계승 정신이 투철하여 당나라를 공격해 고구려의 많은 땅을 되찾았습니다.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 때에 와서는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되찾게 되었고 고구려의 전통문화에 당나라의 좋은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를 더욱 튼튼하게 정비했습니다.

 

'바다 쪽의 번영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때가 9세기 초, 선왕 때는 발해의 황금기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무렵 당나라와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발해를 찾아와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발해의 미술과 공예품들은 사신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그중 도자기는 많은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발해의 멸망

그당시 풍요로워진 발해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면서 부패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당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 거란을 발해의 지도층들은 얕보고 있었습니다. 선왕 이후 왕위 계승 분쟁이 계속되었고 소수의 지배층인 고구려인과 다수의 피지배층인 말갈족과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애왕 때인 926년 발해는 거란족에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지 228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광활한 고구려의 땅을 다시 찾지 못하였습니다.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훗날 주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라 칭한 여제였습니다. 그녀는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잔인한 책략과 탄압을 펼쳤으며, 특히 자기를 반대하는 황족과 대신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이 되었으나 측전무후의 나이 25세에 남편인 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측천무후를 흠모하였던 고종이 다시 후궁으로 삼아 총애하였고 정비였던 왕 황후를 폐위하고 측천무후를 황후에 올렸습니다. 몸이 병약한 고종 대신 29년 동안 국사를 처리하며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성질이 잔혹하여 자기 권력에 대비하는 행동을 하는 아들까지 죽였다고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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