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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시대의 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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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대왕 혜종(태자 무)

혜종은 왕건의 맏아들이자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입니다. 혜종은 태자시절 후백제를 정복할 때 큰 공을 세웠을 정도로 용맹했으며 덕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왕건의 걱정대로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하여 세가 약했고 태어났을 때부터 얼굴에 주름이 많다 하여 '주름살 임금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왕건의 셋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요와 소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 외가 쪽의 세력도 막강해 혜종에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왕건은 태자 무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이 큰 왕규와 김긍률의 딸을 태자와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왕규의 또다른 딸은 태조 왕건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왕규는 현재 왕인 혜종의 장인보다 태조 왕건과 결혼하여 낳은 손주가 왕이 되어 왕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더 큰 세력을 가질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에 혜종의 형제들을 제거하여 자신의 손자가 왕이 될 가능성을 높이려 했습니다. 혜종의 동생인 소와 요가 왕위를 탐한다 음해하려 하였지만 대광(고려초기의 으뜸 관직) 박술희의 첨언으로 혜종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규는 왕을 죽이려 하였고 이또한 소와 요에게 덮어 씌우려 했지만 혜종은 왕규의 음모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규의 세력이 커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음을 한탄하였고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예민해진 혜종은 태자 시절의 총명함이 사라졌습니다. 충신 박술희마저 의심을 해 귀양을 보낸 혜종은 얼마 뒤, 불안정한 정신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결국 945년 혜종은 재위 기간 2년 4개월 만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고려 제3대왕 정종

혜종의 태자가 어려 혜종의 형제인 왕자 요 '정종'이 제3대왕에 올랐습니다. 정종 역시 왕규의 반란으로 골치가 아프던 중 지금의 평양인 서경에 있는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 장군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혜종의 어린 태자가 왕규의 손자였는데 그를 왕위에 올리고자 왕규가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왕식렴이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서 왕규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왕규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모두 체포돼 귀양을 갔다가 정종에 의해 모두 죽었습니다.

 

정종은 왕규와 같이 많은 사병을 거느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한 광군 조직에 사병들을 합류시켰습니다. 왕규의 잔당이 남아 있을것을 염려하여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려 했고 많은 백성들이 궁을 짓는데 착출 되어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종은 백성들의 힘듦을 고하며 수도를 옮기는 것에 반대하는 동생 소를 의심했고 점점 변해갔습니다.

 

어느 날,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러 온 사신이 벼락을 맞아 죽었는데 이것을 두고 하늘이 노했다 생각해 놀란 정종은 심약해져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정종은 동생인 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재위 3년 6개월 만인 27세의 나이로 혜종에 이어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고려 제4대왕 광종

왕위에 오른 광종은 수도를 옮기는 것을 취소하여 민심을 얻었고 왕권강화를 위해 몇 년 동안 호족들을 자극하는 정치를 하지 않으며 은밀히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호족들의 많은 노비는 가난한 양민이나 전쟁 포로들로써 군사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비 안검 법'을 만들어 노비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귀족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광종은 흔들리지 않고 의지를 관철해 냈습니다.

 

그리고 '음서'라고 해서 공신 또는 5품 이상의 고위 관리의 자손들은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들을 제한하기 위해 중국에서 온 쌍기라는 사람과 의논하였습니다. 쌍기는 대륙 후주에 보낸 사신을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 병을 얻어 치료차 머물렀는데 그의 식견에 반한 광종이 후주에 허락을 얻어 그를 귀화시키고 벼슬을 주었습니다.  

 

쌍기는 과거제도 시행을 건의했고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오로지 왕을 위하는 세력을 만들어 왕권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왕권강화에 중점을 두다보니 특권을 빼앗긴 많은 호족과 귀족들이 반발하였고 광종은 이들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두고 피의 숙청이라 불렀습니다. 많은 제도들을 확립해 왕권을 강화하였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숙청으로 인하여 양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충신 박술희

박술희는 원래 궁예의 호위병이었으나 후에 태조 왕건을 섬겨 백제를 치는 데 큰 공을 세워 고려의 으뜸 관직인 대광에 올랐습니다. 왕건의 아들 무를 태자로 봉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왕건의 큰 신임을 얻은 박술희는 왕건이 죽을 때 군대를 지위. 통솔하는 통수권을 위임받고 훈요십조를 전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혜종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왕규가 역모를 꾀하면서 둘 사이가 나빠졌고 이에 박술희는 신변 보호를 위해 100여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역모를 꾀한다는 왕규의 음해로 강화 갑곶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왕규는 '왕명'이라고 속여 박술희를 죽였습니다.

 

고려 시대의 근친결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태조 왕건의 결혼 정책으로 많은 부인과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하는 '근친결혼'도 시행했습니다. 다른 부인들 사이에 낳은 아들과 딸들을 결혼시켜 이중 삼중으로 친척관계를 맞게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남매끼리 결혼한 것입니다. 

 

혜종은 자신이 죽은 후 가족들이 화를 입지 않게 하기위해 동생 소(광종)에게 자기 딸을 둘째 아내로 맞아 줄 것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왕건은 자신의 왕씨 성을 다른 호족들에게 내려 주기도 해서 모두 한 가족이 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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