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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후삼국시대와 고려를 건국한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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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의 시작과 신라의 멸망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신라가 되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내부의 문제로 더욱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계급사회로 인해 성골과 진골 그 외 귀족들까지 서로 권력을 키워나가려고 헐뜯고 싸워댔습니다.

 

그 틈을 타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은 농사지을 땅까지 빼앗기자 도적이 되거나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발 빠르게 움직인 세력들이 바로 지방세력인 '호족'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왕이나 고위관리는 되지 못했지만 사병을 거느릴 수 있었고 재력 또한 갖추었으며 그 지방에선 왕처럼 군림하였습니다. 떠돌이 백성이나 굶어가는 백성들을 모아 사병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이 혼란을 틈타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점령하고 신라의 서쪽에 후백제를 세웠으며 신라의 북쪽으로는 신라의 왕자였던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워 세력을 넓히고 있었습니다. 계속된 견훤과 궁예의 싸움으로 신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호족은 궁예와 견훤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바야흐로 후삼국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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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궁예 궁예의 어린시절 아이는 오늘도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깊은 산골이라 같이 놀아 줄 친구 한 명 없었지만, 산토끼나 다람쥐를 쫓아 골짜기를 달리고 신기한 풀과 꽃을 가지고 놀면 마냥 신나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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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잃은 궁예

궁예는 바다를 통해 외국과 교류를 하며 막대한 부를 쌓고 있었던 호족인 왕륭(왕건의 아버지)이 지배하던 송악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왕륭은 먼저 궁예에게 손을 내밀었고 대신 송악의 성주로 왕건을 임명하였습니다. 이때 왕건의 나이 20세였으나 해적들과의 대적으로 해상전에 강하며 늠름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스님이었던 도선대사는 송악산에 왔다가 '장차 왕이 태어날 형세로군.' 이라며 송악의 호족인 왕륭에게 글로 적어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왕륭은 도선대사가 일러준 대로 36채나 되는 대궐 같은 집을 지었고 얼마 후 왕건이 태어났습니다. 왕건의 탄생을 예언했던 도선대사는 17년 만에 다시 왕건의 집에 찾아와서 송악산의 절로 왕건을 데리고 가 정치, 군사, 천문 지리, 무예에 관해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 송악의 성주가 되어 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911년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꿨는데 이때부터 민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을 가혹하게 다스렸고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술법인 '관심법'을 익혔다며 자신이 의심하는 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궁예의 부인인 강씨와 두 아들마저 의심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

반면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아지는 왕건의 이야기에 화가 나 나주를 점령하고 있던 왕건을 불러들였는데 이미 궁예의 의심을 걱정하던 왕건은 꾀를 내어 자신이 역모를 꾀하였다며 벌을 청하였고 궁예의 관심법을 높이 샀습니다. 이에 궁예는 대역죄를 지었으나 그동안의 공을 인정하여 너그럽게 용서하였고 나주로 돌아간 왕건은 궁예의 심각함을 알고 훗날 고려의 개국 공신인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을 불러 상의를 하였습니다.

 

왕건은 신하들의 뜻을 받들어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건의 나이 41세였습니다.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 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지었고 다음 해인 919년에 송악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습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며 국력이 약해지자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신라와 손을 잡았습니다.

 

 

 

 

왕건의 부인 유화부인(신혜왕후)

왕건이 장군들과 궁예의 일을 상의할 때의 일화입니다. 유화부인이 술상을 차리러 들어오자,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 오이를 따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유화 부인이 나가자, 장수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장수들은 궁예의 횡포에 백성들뿐 아니라 관리들까지 견디지 못하고 궁예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하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왕건은 이것도 역모를 꾀하는 것이기에 깊은 고민에 빠졌는데요 이때 유화부인이 들어왔습니다. 유화부인의 손에는 오이 대신 갑옷과 투구가 들려있었는데 왕건과 장수들과의 대화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심을 굳힌 왕건은 갑옷을 입고는 네 장수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포위하였고 궁예는 허둥지둥 도망가다 백성들에게 붙잡혀 참혹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견훤을 도와준 왕건

후백제와 고려도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배다른 동생인 금강이 견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을 알고 견훤의 아들인 신검과 양검, 용검은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습니다. 겨우 탈출한 견훤은 왕건에게로 가 귀순하였고 왕건은 고운 마음씨로 견훤에게 벼슬과 궁궐까지 내주었습니다. 

 

견훤이 아들인 신검을 직접 벌할 수 있도록 해달라 부탁하자 936년 왕건은 8만 7천여 대군을 동원하여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신검의 후백제군은 일리천 전투에서 대패하여 왕건에게 항복했는데 반란에 앞장섰던 양검. 용검은 처형하였으나 신검은 이들에게 추대되었을 뿐이란 이유로 용서하여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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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견훤의 어린 시절 일화 옛날 상주 가은현(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이라는 고장에 아자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자개는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출세하여 사불성에서 장군이 되었습니다. 아자개는 아들 넷과 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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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항복한 신라

견훤까지 귀순했다는 얘기를 듣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는 고려에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덕망 있는 왕건이 다스리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이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935년 경순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고려의 수도인 송악으로 떠났습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지 992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왕건은 경순왕과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꼬 정승공(왕 다음의 벼슬)이라는 벼슬도 내려주었습니다. 왕건은 신라의 수도 금성의 명칭을 경주로 바꾸고 경주를 경순왕 김부에게 하사했습니다.

 

***마의태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태자였던 마의태자는 싸워 보지도 않고 고려에 항복하는 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신라의 일천 년 사직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마의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을 따라 고려로 가지 않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산속에 들어간 태자는 마(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고 하여 그를 '마의태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왕건의 결혼 정책

왕건은 고려를 세운 뒤에 호족이나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결혼 정책을 펼쳤습니다. 왕건은 세력가들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호족들의 아들을 중앙으로 데려와 볼모로 있게 하는 기인제도를 실시해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내가 29명이고 아들도 25명이나 되자 세력다툼이 생길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특히 태자 '무'는 왕건의 장남으로 재주가 뛰어났으나 다른 아들들의 귀족 출신 어머니와 다르게 무의 어머니는 출신이 미천하여 걱정이었습니다. 왕건은 몸이 허약해지자 박술희 장군을 불러 임금이 지켜야 할 열 가지 도리인 훈요십조를 알려주며 태자를 보필하라 명하였고 943년 5월 67세를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왕건의 훈요십조

 

1. 부처님의 은혜로 나라를 세웠으니 불교를 잘 위하라.

2. 절을 지을 때는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르라.  그리고 함부로 절을 크게 짓지 말라.

3. 왕위는 장남부터 순서대로 물려받는 게 원칙이나 덕이 없으면 형제 중에서 덕이 많은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라.

4. 억지로 중국 풍습을 따르지 말라.  특히 거란의 풍속은 절대 본받지 말라.

5. 서경(평양)을 중히 여겨라.

6. 부처님을 모시는 연등회와 하늘 신을 모시는 팔관회를 소홀히 하지 말라.

7. 신하들의 바른말과 그른 말을 잘 가려 들어야 한다.  또한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으라.

8. 차령산맥 남쪽이나 공주강(금강) 밖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

9. 벼슬아치들의 녹봉을 함부로 늘리거나 줄이지 말고 법대로 지급하라.

10. 경전과 책을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지금의 일을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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